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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뭉치

빨간색 초록색 차단기 페인트 용달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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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아파트 단지들이 성처럼 입구를 만들고 차단기를 설치하는 모습이 유행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빌라에서도 종종 보인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성벽 같은 아파트(내가 얹혀 살던 곳) 구조에 흥미를 느꼈지만, "전형적인 한국인의 욕망"이라는 서사를 떠올리게 만들어 작업으로 가져오기 어려웠다. 특히 회화로 아파트에 대한 인상을 그리려 했을 때, 흥미로운 부분을 사진처럼 옮기자니 "차라리 사진을 찍지"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회화적으로 표현하자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를 형태가 되곤 했다.
 
오늘 은평구로 도색 알바를 하러 갔다.  D님이 불러줘서 하게 된 일이고 인천에서 가벽 설치를 도와드린 이후로 꾸준히 불러주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이번년도 재정적자를 막아준 구원자) 오전 7시 30분쯤 도착해서 16시 30분까지 일했다. 끝나갈때 즈음 새로 딴 페인트와 이전에 칠한 페인트가 같은 색임에도 달라 다시 칠했다. D님은 페인트가 오래돼 색소가 밑으로 가라앉아서 이런 차이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두 페인트 모두 하늘색이었지만 새것은 희고 오래된 페인트는 더 진했다.
 
초록색 차단기는 도색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길에 발견했다. 내가 본 대부분의 차단기는 내려와 있을 때 빨간색이었다. '넌 못 지나간다' 하는 빨간색. 차단기가 올라가면 '통과 가능' 하며 초록색. 이게 상식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은평구 차단기는 좀 반대인것 같았다. 왜 반대일까? 건물주가 느끼기에 차단기가 평소에 빨간색인게 신경질적으로 보였을까? 궁금하다. 나는 차단기를 그렇게 보는 편이긴하다. 비둘기 퇴치용 버드스파이크같은 신경질.
 
밑에 그림은 최은영작가의 전시 칼리코 Calico(2024) 전시에서 본 작업이다.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는 선인장인가 하고서 봤는데, 직접보니 차단기가 올라가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런 구도로 얇고 길게 차단기를 그려놓으니까 낯설게 다가왔다. 침전된 색소 때문에 원래 색보다 진해진 하늘색같은 느낌. 그림을 감상하면서 기분좋았다. 침전된 기분좋은 낯섬.
 
지난 주말엔 오래된 그림을 옮겼다. 군말 없이 일을 해 주시는 멍한 표정의 용달 기사님을 또 불렀다. 기사님 도착 전에 방문 차량 진입 방식을 확인하려고 관리사무소에 들렀다. 한 달 전 차단기를 교체한 걸 떠올리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러 갔다. 경비아저씨는 방문객 출입 방식이 변했다고 알려주시고 동 호수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고 비밀번호는 #### # ### 라고 하셨다. 친절하게 알려준 경비아저씨는 대뜸 "경인선이 이 근처로 지나가게 해주세요" 를 위한 서명운동에 이름을 적길 권하셨다. 친절한 안내와 물흐르듯이 이어저 홀린듯이 적고 나왔다. 그리고 기사님에게 동 호수와 비밀번호를 전달했다.  
 
기사님은 익숙해진 멍한 표정으로 짐을 옮겨주셨다. 기사님에게 길을 조금 알려드리자 네비를 찍으려는 손을 멈추고 "저번에 갔던 곳으로 가면 되죠?" 라고 약간 머쓱해 하면서 되물었다. 일당은 삼만원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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