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글|모희
주최·주관|별관
후원|서울문화재단
수현씨 집 근처에 별관이 있어 편하게 다녀왔다. 정말 거의 10분 거리에 전시장이 있었다. 세상에 모든 전시장이 이랬으면 별관은 망원시장을 가로질러 가게 됐는데 시장이 만들어낸 소음을 통과해 들어온 전시장이어서 그런지 더 시원하고 좋았다.
뭘까? ETJE 구글 검색하니까 갈증이 따라 나온다. gpt 한테 물어보니 알바니아어로 갈증이란 뜻을 갖고 있고 네덜란드어론 ~귀여운 같이 어떤 대상을 귀엽게 표현할 때? 사용된다고 한다.
얇고 빽빽하게 새기고 차분히 침전되는 화면.
이전 전시 <우린 흔들리는 땅에 집을 지었다>(2023) https://ceilingleak.tistory.com/24-에서 잠깐 등장한 나무 부조, 어두운 조명아래서 봤던 그림을 이번 전시에서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다. 나무부조는 이전 전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만들고, 전시했다. 나무를 열심히 깎고 다듬은 흔적은 그림에서 색연필 입자를 닦아내고 그리고 채워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연결되며 읽혔다. 이전 전시에서 어두운 조명아래 있던 그림은 밝은 곳으로 와서 의뭉스러운 느낌이 줄었지만, 그림의 디테일한 표현들을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새로 보게 된(물론 수업 때 종종 봤지만) 신발그림이 참 좋았다. 각각의 형상의 조합으로 이야기를 관계를 상상하고 읽는 게 아니라 한 화면의 인상으로 읽혀 좋았다. 화면을 이야기로 읽히게 되면 그림에서 오는 인상이 줄어들고 그림이 그림으로 다가오는 감상이 약해진다 생각해서 더 좋아하는 듯.
나무를 깎고, 닦고 지우고 새기는, 이런 반복이 쌓인 표현과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이 만들어 낸 조용한 긴장감 좋아!
저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상실의 경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과 같아서, 매일은 아니지만 매번 끝도 알 수 없는 밑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작가님은 어떠세요? 자주 삶과 죽음을 한데 겹쳐보는 작가님의 시선 앞에 상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장 한켠에 놓인 <한 사람과 여섯개의 손을 위한 테이블 >(2024)이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어요. 작가님은 관을 운구하던 흰장갑 낀 손과 손들이 나르던 관의 묵직함, 망자의 집을 한바퀴 돌아 묘지로 가던 길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어요. 그 기억을 더듬듯 테이블은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즉 '방'과 '관'을 지시하는 타원영의 합판과 이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여섯개의 손다리로 만들어졌어요. 저는 사람들이 여기 둘러 앉아 서로의 안녕을 묻고, 시간을 보내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깎아 내고,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들을 되새기면서요.
- 글, 모희
전시 글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돼있어서 정말 좋았다. 습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비 온 뒤 촉촉하지만 상쾌한 느낌의 글. 어떤 죽음,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정도 담담함으로 적어주면 너무 감사하다. 왜냐면 이런 죽음이란 상실이란 주제가 너무 무거워지면 정말 감상하기 힘들다..(나는) 그렇다고 너무 힘든데 담담한 작업을 하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작업으로 소화된 무언가 나와야지!
죽음.. 죽음.. 죽음.. 죽음
나는 무단횡단할 때마다 " 오! 오늘은 살아서 다행이군"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건 규칙을 어기고 내 목숨을 상대의 순발력에 맡긴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것이기도 건너서 살아 있을 때 느낀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아무 차도 안 지나다닌 상태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진짜 차에 치일 뻔했을 땐 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인가? 사거리 골목에서 팍! 튀어나가다 내 왼쪽에서 들어오던 차가 거의 치일 뻔한 적이 있다. 정말 자동차 보닛을 퍽! 하고 짚어 살았던 기억.
~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땐 항상 게임 속 캐릭터들의 대사를 생각하곤 한다. 뭐 "죽음이 가깝다."라든지 "죽음의 신 앞에 무릎을 꿇어라!" 라던지 "영원한 왕 따윈 없어 오직 죽음만이 영원하다"라던지 "살아서든 죽어서든 우리와 함께해라" 같은 대사들 말이다. 죽음과 상실에 관한 작업들을 보더라도 일부러 이런 대사들을 떠올린다. 게임 속 저 대사는 진중한 목소리의 성우가 말하는데 그게 더 저 대사들을 연극 같고 공허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대사들의 빈 느낌이 좋고 내게 너무 무거운 죽음, 상실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 떠올린다.
~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둘째 고모 집에서 돌아가셨고 할머니의 시신을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죽어있는 방에 혼자 들어가서 당신을 얼마나 XXXXX XXXXX를 말했고 XXX 구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마를 만졌다. 할머니의 이마는 말랑했다. 군대에서 만진 사후경직이 돼 딱딱하게 죽은 고양이시체나 자동차 바퀴에 쥐포가 된 쥐시체와는 달랐다. 죽은 할머니의 피부는 살아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말 실리콘 무언가 물건 같은 촉감을 가졌다.
할머니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렀다. 이때 화장을 진행하는 사람이 큰아버지에게 "곱게 갈아드릴까요. 아니면 두껍게 갈아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순간 화장하는 곳이 카페 같아졌다. 할머니는 곱게 갈렸고 할머니 집 근처 할아버지가 묻힌곳에 같이 묻혔다.
죽음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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